[6·25 70주년 특집 기사]

· 잊혀질 수 없는 전쟁, 6·25

유엔군과 미군 그리고 희생자들의 ‘고귀한 피’가 이 땅에 뿌려졌다. 70년이 지난 오늘, 한국은 응고된 피의 바탕 위에 ‘인간의 존엄성’을 헌법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수령 절대주의에 기반한 주체사상을 헌법상 최고의 가치로 여긴 북한은 한 사람은 ‘신’이 되었으나, 나머지 주민 대부분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본문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한반도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6·25 70주년] 1945년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위 한국에 주둔한 소련군

1950년 6월 25일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떠난 뒤, 북한의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은 스탈린의 재가를 받고, 소련제 탱크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 하기 위해 새벽 4시 침공을 감행했다.

[6·25 70주년]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서울에 입성한 북한 인민군

소련의 PPsh ‘버프포’ 와 포병 , T-34-85 전차등을 무장한 수천 명의 공산군 전투기가 남하하면서 한국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6·25 70주년] 유엔 주재 미국 대표 워런 오스틴이 '버프포'로 알려진 소련제 PPsh 기관총을 들고 있다. 이 사진은 스탈린이 북한 김일성의 배후에 있다는 증거로 활용된 사진이다.

1930년대 나치(Nazi) 침략에 대한 ‘항복’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한국에 대한 군사적’개입’은 당연시 되었다. 유엔의 제노사이드 협약(Genocide Convention)과 ‘세계인권선언’ 등은 한국전 참전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유엔안보리 결의안이 7대1로 통과된 가운데, 공산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도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그 지역에 대한 국제안보와 평화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6·25 70주년] 유엔안보리 결의안이 7대1로 통과된 가운데, 공산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도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그 지역에 대한 국제안보와 평화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미군이 대전역에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

유엔이 지원하는 “경찰 행동”은 공산주의자들의 남진을 늦추기 위해 미국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6·25 70주년]1950년 7월 초, 서울의 강남 지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처형된 미군의 시신

한국에 처음 들어온 미군 병력 400여명 중 60 여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

[6·25 70주년] 전우가 전사 했다는 비탄에 잠긴 미군 병사를 또 다른 전우가 위로하고 있다. 뒷 군인은 사상자를 기록하고 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공산주의자들은 UN군을 한국의 동남쪽 끝 부산까지 밀어 넣었다.

[6·25 70주년]1950년 부산 방어선에 주둔한 미군들

마지막 방어선인 부산에서 북한 인민군을 저지하면서 부산항을 통해 대규모 증원군과 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6·25 70주년] 한국에 도착하는 에디오피아군의 모습. 미군에 비해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16개국의 유엔군은 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가을이 다가오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북한 인민군의 후방을 노리는 인천 상륙 작전을 명령했다.

[6·25 70주년]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이후 인천항 모습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공산군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한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1950년 9월20일 서울을 수복한 미군들이 전투 중에 있다.
1950년 9월 대전에서 후퇴하던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400여명의 한국 민간인 시신. 목격자들은 희생자들이 살해되기 전 구덩이를 스스로 팠다고 증언했다.
1950년 9월26일 북한인민군들이 미군 탱크 근처에서 검거됐다.

10월까지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인천상륙작전의 기습으로 공산군이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7일 수원 인근 다리를 건너다 공습을 당한 북한 전차

 

유엔군은 극적으로 북한 인민군을 38선 위쪽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남북한의 공식 경계선인 38선 위로의 진격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 가운데, 워싱턴은 주한미군 지도부에 ” 우리의 군사적 목표는 38선 북쪽의 북한 인민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10월 21일, 미국의 군함이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인 청진에서 북한 인민군의 진지를 공격하고 있다. 유엔은 공중권과 해상권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중국 인민 해방군은 가볍게 무장했지만, 수십만 명의 인민 해방군을 북한으로 보내 은밀하게 분쟁에 뛰어들었다.

1950년 12월 미군 해병대 병사들이 자국의 공군이 공습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950년 말 북한 상공에 가공할 소련 MiG-15전투기가 등장했다. 제트기의 상당수는 중국 유니폼을 입었지만 미군 조종사들이 교신 도중 러시아어로 욕설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국 상공에서 소련 조종사들의 공중전 개입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1950년 12월 '중국인민 해방군 3개 사단'의 기습공격에 직면했다.

인해전술의 중국 인민 해방군에 유엔군은 다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흥남부두에서 철수한 유엔군은 유엔물자를 폭발물에 의해 파괴했다.
1951년 유엔군은 대규모 공중 투하 작전을 감행했다.

후퇴하던 중 남쪽의 유엔군 증원군에 의해 다시 한 번 전세를 역전 시키는데 성공했다.

1951년 3월 강원도 횡성 부근에서 포로로 잡힌 중공인민해방군

전쟁 중인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1951년 여름까지 휴전 협상을 시작하기로 동의했다.

미 해병대 참호 근처에서 박격포가 터지자 몸을 숨기고 있다.

1953년 7월27일 양측이 38선을 따라 선을 그은 후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았고, 한반도는 여전히 정전상태로 남아 있다.

이 전쟁은 약 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대부분이 민간인들이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17만 8천여 명이 전사했고, 55만 5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반도의 주요 도시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유엔군과 미군 그리고 희생자들의 ‘고귀한 피’가 이 땅에 뿌려졌다. 70년이 지난 오늘, 한국은 응고된 피의 바탕 위에 ‘인간의 존엄성’을 헌법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수령 절대주의에 기반한 주체사상을 헌법상 최고의 가치로 여긴 북한은 한 사람은 ‘신’이 되었으나, 나머지 주민 대부분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6.25 70주년]1951년 전쟁 중, 인천의 교회 앞에 어린이가 홀로 앉아 울고 있다.

사진출처: RFA 

온라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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